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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人文學) 이것저것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내용 정리 (2) - 7장 ~ 부록

관리자 2021. 10. 1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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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팬데믹 대처에 대한 방안에는 2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트럼프식으로 희생은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자유를 보장하는 방식이다. 두번째로 중국식으로 그저 통제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제 3의 선택지가 있다. 비접촉을 기반으로 한 자유 보장이다. 하지만 이는 어떻게 보면 '스크린 뉴딜 정책'이다.

 

스크린 뉴딜 정책이란?
스크린은 휴대폰, 태블릿, 컴퓨터의 스크린을 의미한다. Naomi Klein 아티클에서 최초로 언급했으며, 전자기기의 스크린을 통해 모든 것들을 하는 일종의 팬더믹 쇼크 교리(Pandemic Shock Doctrine)라고 있다. 기사 참고.

 

 

 하지만 이러한 스크린 뉴딜 정책으로 인해 구글과 애플과 같은 기업에 네트워크 통제권이 넘어가면 우리 가정도 '교도소'가 될 수 있다.

 

 이에 대한 핵심쟁점 2가지는 아래와 같다.

  1. 특권을 누리는 계층이 가장 많이 통제를 받게 된다. 이러한 특권을 누리는 계층은, 예를 들어 인터넷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계층들을 의미한다. 구글과 애플이 데이터와 정보를 조작하고 개입하면? 우리의 자유가 민간의 통제하에 있게 된다.
  2. 새로운 계급 투쟁이 개입하게 된다. 배달원, 간호사, 물자 조달하는 사람들과 같은 caretaker가 더 보호를 요구하는 직업 군이 것이고, 이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계급 투쟁을 하도록 조장하게 것이다.

 

 결론, "세계의 또 다른 종말은 가능하다." 이 말이 스크린 뉴딜 정책에 대한 응답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비접촉의 미래가 우리의 유일한 선택은 아닐 이라는 말이다.


8장

 영국 BBC 방송에서 '천국에서의 죽음(Death in Heaven)'이라는 TV 시리즈가 있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예전 본인(A)을 학대하던 사람(B)을 섬에서 만났고 이를 죽였는데, 그 학대하던 사람(B)은 예전에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죽인 사람의 증거를 대신 없애준다. 이러한 B 행위에는 고귀한 면모가 보인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이를 도착적인 행위로 바꾼다.

 사람들을 희생시켜가며 일찍이 일상으로 복귀 시킨 트럼프가 학대하던 사람(B)이고, 더 봉쇄를 풀어달라 시위하는 사람들이 학대를 당한 사람(A)이다. 트럼프는 팬데믹 초창기에 봉쇄 따위는 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사람들을 일상으로 복귀시켜 노동자들이 돈을 벌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이 바이러스라는 죽음에 더 노출되게 되었다.

 이후 트럼프는 팬데믹이 심해지자 나라를 봉쇄했다. 하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던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작업장에서 '죽을' 권리를 달라고 하게 만들었다. 트럼프는 봉쇄를 풀어주면서 자신이 저지른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것을 감추고 없애버렸다. 트럼프는 자신의 죄를 없앤 것이다.

 

 반인종차별주의가 폭력적인 것은 맞다. 마치 살인을 한 A 같이. 하지만 우리는, 마치 희생자 BA의 죄를 덮어줬듯이, 이들에 대한 관대함을 보여주고 이해해줄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노동자들이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은 누구이며, 흑인이 폭력시위를 하게 만든 주체가 누구인지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이며, 이데올로이기며,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에 대한 관대함을 베풀자는 것이다.


9장 코로나, 인종차별, 생태학적 문제

 현재 코로나로 인종차별, 생태학적 문제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기득권세력은 이 셋을 분리시키거나 서로를 긴장하는 분위기를 조성헸다. 셋은 관련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셋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바이러스는 생태학적 불균형에서 발현된 것이다. 인종차별주의는 자가격리를 제대로 하는 백인세력에 비해 자가격리는커녕 밖에서 일하고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흑인세력은 코로나라는 위험이 크게 노출돼있다.

 

 반인종차별주의에 대해 좀 생각해보자. 오바마가 당선됐지만 딱히 달라진 건 없다. 왜냐면, 오바마가 골수흑인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오바마는 자유주의를 존중하는 흑인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흑인을 더 옹호하면 백인들의 표를 잃기 두려워서이지 않을까? 흑인을 더 옹호하면 자유주의 세력을 표방하는 본인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지 않을까? 오바마대신 힐러리 클링턴이 당선되었다면? 미투 운동은 없었을 것이다. 여성들이 남성들을 비판하는 페미니즘이 만연하면 남성들의 표를 잃기 때문이다. 흑인들의 투쟁은 흑인들을 희생양으로 봐선 안 되며 자율적 행위자로 봐야 한다.


10장

 매트릭스 영화에서는 주인공에게 파란 약과 빨간 약을 건네주며 선택하라고 한다. 파란 약은 현실에 안주함을 선택하는 것이고, 빨간 약은 현실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를 현실에 비유하면 온라인강의를 하는 교수는 파란 약을 선택하는 것이며, 뉴럴링크 프로젝트 추진하는 일론 머스크는 파란 약을 선택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회당을 열고, 음식점들은 마스크 끼면 출입을 금지한다. 대체 이러는걸까?

 

 코로나는 4가지 폭풍을 몰고 오는 중이다. 의료난국, 경제위기, 국제분쟁, 정신건강붕괴 그것이다. 2개는 주목을 받고 널리 논의되고 있지만, 2개는 그렇지 않다.

 

 중국은 팬데믹 상황을 이용해서 홍콩 대만을 공격하고 있다. 이는 코로나가 가져온 국제 분쟁 문제다. 선술집은 하층민이 위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지만 여기에 가질 못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코로나가 가져온 정신건강붕괴 문제다.

 

 우리는 빨간 약을 먹어야한다. 이 빨간 약은 폭풍에 대비하기 위한 힘을 모아둔다는 의미이다.


11장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의 정도를 나타나는 단계로 구분 짓곤 한다. 하지만 이런 바이러스 자체가 문제되기보다는 이를 통해 발생하는 국제적 분열 , 국내적 분열, 계급 분열 등이 문제다. 결국 가난이라는 뚜껑이 열린 뿐이다. 단순히 제도를 개선하면 해결되는데 해결되지 못한다. 마치 각종 영화에서 문재를 해결하려는데 이상한 알 없는 이유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헤겔이 말한 것처럼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은 역사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를 생각해보면, 예견된 재앙을 막기 위해 한 행동들이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헤겔이 말하기를, 우리는 역사로 배운 것으로 미래를 예측하는데 이러한 미래로부터 발생하는 재앙을 막기 위해 하는 행동들이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그럼 우리는 정녕 해결할 없는걸까? 해결하려면 본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스 삼원 존재인 크로노스(직선의 시간), 아이온(순환의 시간), 카이로스(새로운 것의 발생)으로 바이러스의 시간성을 비유할 있다. 카이로스 관점에서 바이러스를 통해 새로운 것을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0세기 우리는 너무 빠르게 변화를 도모했다. 이 변화를 다시 되돌아봐야 할 때이다.


13장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사실상 중립적이지 않다. 대중들이 무관심해지면 민주주의의 의미는 퇴색된다. 자유주의 다수정당제는 마치 굉장히 중립적이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사실 다수에 의한 통치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노란조끼 운동과 같이 국가로부터 탈취하려고 하면 안 된다.

 

 폭력은 진정한 변화를 위한 산통일 뿐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하지만 변화를 위해 폭력이 없을 수 없다.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려면 트럼프를 이기는 것보다 트럼프의 이념을 죽여야 한다.


14장

여기서는 저자가 팬데믹으로 인해 드러나는 여러가지 문제(불평등 온난화 인종차별 권력문제 여성문제 등)를 언급한다.

 

 팬데믹으로 드러난 여러 문제를 과학이나 의료제도, 국가제도로 해결하려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르조아감벤 등) 하지만 이게 답일까? 방역 수칙은 지켜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과학기술이나 제도가 답일까? 또 그렇지만은 않다. 이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려면, 마치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을 파도가 쓸어가듯이, 새로운 시대, 포스트휴먼이 필요하다.


부록

 새로운 포퓰리즘의 특징은 이렇다. 대중의 표를 얻기 위한 것은 과거와 동일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민주주의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고 기득권의 권력을 빼앗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그래서 겉은 대중들에게 '나 착해요'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기득권들을 '죽여야 해요'라고 한다.

 

 좌파와 우파는 상호보완적이다. 좌파는 우파의 위반에 대한 욕구에 대한 도덕적 분노를 표한다. 우파는 좌파의 도덕적 분노를 먹고 살아간다.

 

 현재 포퓰리즘의 상태는 이렇다. 여성들이 더 많은 권력을 잡고자리에 올라야 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의 전체적인 구조는 달라지면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하지만 나는 계속 부유해야 한다.

 


최종 결론

 새로운 윤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는 정치인들이 제일 써먹기 좋은 것이다. 우리는 상황의 근본을 파악하고 인지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되, 이 때 상황을 구성하는 여러 측면들을 차별적으로 생각해서 는 안 된다. '코로나가 중요하니, 인종차별이나 지구온난화는 잠시 제쳐두자!' 같은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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