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GANIZED MESS

포뮬러원을 좋아하면서, 이것저것 공부도 하고, 일상도 공유하는 다소 정체성의 혼란이 내재되어있는 그러한 블로그입니다.

ECONOMICS/경제 이것저것

경제 이것저것 #02 : 유대인은 어떻게 네덜란드 시장을 장악했는가? (삼프로TV) (1)

관리자 2021. 6. 10. 15:45
반응형

* 본 포스팅은 삼프로TV의 "유대인이 네덜란드에서 부를 지배한 방법 f.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신과함께 #179]" 편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https://youtu.be/GZ-8upInfJ4)

유대교의 상징인 육망성 (출처: 구글)


 유대인은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과거에 이 나라 저 나라를 유랑하던 유대인들. 유대인의 발걸음이 닿는 곳은 항상 부가 일어났고, 유대인이 떠나면 경제가 쇠퇴했다.
유대인들과 관련된 여러 역사적인 내용이 있다. 그 이야기들 중, 유대인들이 경제를 어떤 식으로 지배했는지, 특히 네덜란드라는 국가의 부와 경제를 어떻게 끌어올렸는지 이야기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유대인, 스페인 통일 왕국에서 추방 당하다.

 1492년은 중세와 근대의 분기점이다. 이 해에는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 여럿 발생했다. 그 중 하나가 흔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 가려 현재 대중들에게 주목 받지 못한 사건이 있었다.

통일 전 스페인 왕국 (출처: 구글)


그 중 하나는 스페인 통일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모두 몰아낸 사건이다. 가톨릭 군주였던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와의 결혼으로 두 지방이 통일해 스페인 통일 왕국을 만들었다. 이는 기독교 세력들에게 굉장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유럽 대륙은 이슬람 세력에 무려 약 800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다. 동쪽으로나 서쪽으로나 이슬람 세력에 갇혀 있던 유럽은 기술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이슬람 세력에게 뒤쳐져 있었다. 하지만 점점 이슬람 세력이 힘을 잃어갔으며 스페인 통일 왕국이 수립되어, 이를 통해 가톨릭 세력이 힘을 입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낼 수 있었다는 것에 가톨릭 세력들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스페인 통일 왕국이 수립되고 3개월이 채 되지 않아 알함브라 칙령*을 공표한 사건이다. 이슬람 세력이 자리 잡고 있던 마지막 지역인 그라나다 지역을 스페인 통일 왕국이 점령하면서, 가톨릭 세력의 몇 백년 세월에 걸쳐 추진한 이슬람 체력 축출 과정인 '레콩키스타'가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스페인 통일 왕국은 알함브라 칙령을 공표하는데, 이 칙령의 주된 내용은 '이제 가톨릭의 시대이니 가톨릭을 믿어라. 믿기 싫다면 4개월 안에 짐을 싸서 이 나라를 떠나라.' 였다. 당시 스페인 인구의 700만 중 유대인 50만이었고, 대부분의 유대인은 도시에 살면서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중 37만명이 스페인 왕국으로부터 추방 당했다.
*37만명이라는 수는 역사학자들마다 다르다.

칙령의 조항을 보면, 스페인 통일 왕국은 유대인들에게 재산은 가지고 나가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금, 은, 화폐는 가져나가선 안 되고, 만약 가지고 나가다 들키면 사형을 시키겠다고 했다. 당시 금과 은을 주조해서 화폐(금화, 은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실상 이 칙령의 조항은 '재산을 다 버리고 가라.'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가지고 있던 부동산과 포도밭 등을 팔아 다이아나 루비와 같은 보석을 가지고 나갈 수 밖에 없었다.*

* 그 당시 보석은 그저 옷 장식이나 치장용 등에 쓰여 큰 가치가 없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나간 보석은 나중에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세공산업 번영에 큰 기여를 했다.


쫓겨난 유대인은 이후 위쪽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플랑드르 지역(지금의 벨기에 지역)이다.


알함브라 칙령? (feat. 위키피디아)

알함브라 칙령 원본 (출처: 위키피디아)


알람브라 칙령은 1492년 3월 31일 조인된 칙령으로서 '유대인의 추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당시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가 합작하여 발표한 조약으로 유대인들을 7월 31일까지 추방하도록 했다.
8세기부터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이 가톨릭 세력을 박해했고, 이에 따라 유대인들의 세력도 확장되는 한편 로마 제국 시대에 건너온 유대인들은 더욱 부를 누리며 ‘지식을 가진 자들’로 여겨지며 특권을 누렸다. 또한 유대인들은 가톨릭 박해 과정을 방관하거나 과거 자신들이 겪은 박해의 앙갚음을 위해 간접 지원을 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이슬람 군주들은 유대인의 이민과 무역 활동을 더욱 장려하게 된다. 그러나 이슬람 왕조의 세력이 기울면서 유대인의 거주 환경은 갈수록 악화된다.
가톨릭 세력이 점차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이슬람 세력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스페인 통일 왕국이 수립되기 이전 페르난도 2세
와 이사벨라는 유대인에 대한 감시를 놓지 않았으며 왕실 산하에 특별 조사기구를 만들어 정치적으로 이를 이용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개종했다고 선언한 유대인들 사이로 유대인 첩자를 보내 실제 행동이나 모습을 관찰해 보고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사 후 12년 동안 수천명의 유대인이 개종에도 불구하고 처형됐다.
이 후 스페인 통일 왕국이 수립된 지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칙령이 일어나게 된다. 칙령에서 명시한 유대인들의 죄는 "신성한 가톨릭 교리를 무너뜨리고 신앙 깊은 교도들을 무너뜨리려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일부 유대인들은 단 4개월 만에 떠날 것을 강요받거나 개종을 명령 받았다. 유대인의 재산권 보호를 위해 칙령에 "유대인의 모든 재산권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동산과 부동산을 자유롭게 처분해 국외로 반출할 권리를 부여한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단서 조항으로 "금과 은, 화폐의 반출을 비롯해 국가가 정하는 품목을 금지한다"고 하면서 겉으로만 재산의 반출을 허용했을 뿐 실제로는 금지시켰다.


유대인은 왜 플랑드르로 갔을까?

플랑드르 지역으로의 이주 (출차: 구글)

유대인들이 하고 많은 지역들 중 왜 플랑드르 지역으로 갔을까? 이들이 이주할 당시 플랑드르 지역(현재 벨기에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은 굉장히 부유했었다. 플랑드르 지역이 부유해진 이유는 바이킹족에 대한 얘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게르만인이었던 바이킹족은 당시 상업과 교육 등 나라의 경제에 큰 기여를 했었다. 여기에는 '소금'이 그 몫을 했다.
바이킹족이 항해를 하며 다른 나라를 약탈함에 있어 중요했던 것 중 하나가 식량 보관이었다. 긴 항해 기간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보관을 해야했고, 대구와 같은 생선을 보관하기 위해 이것들을 소금에 절여야 했다. 소금이 필요했던 바이킹은 당시 염전으로 유명했던 프랑스 갈랑드 지역을 침략하여 약탈했다. 반복되는 침략과 약탈에 프랑스는 '노르망 공국을 내어줄테니 이제 그만 침략해라'라고 공표를 했고, 이후 바이킹은 소금을 직접 만들어 사용할 수 있었다.

이후 바이킹은 영국 지역을 침략해 그곳을 지배했다. 바이킹족이 프랑스를 침략할 당시, 그곳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사람들이 유대인이었다는 생각이 든 바이킹족은 유대인들을 영국으로 불렀다. 경제에 특출났던 유대인은 나중에 영국의 경제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허나 경제권을 쥔 유대인을 견제했던 영국은 1290년대에 결국 그들을 추방시키게 되었다. (이때부터 유대인의 이주의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비교적 가까운 지역이 플랑드르 지역이었기에, 유대인들은 이곳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플랑드르 지방에서 모직산업을 키우고, 이를 통해 플랑드르의 경제를 번영하게 했다.

플랑드르에서 네덜란드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지역으로의 이주 (출처: 구글)

이어서 스페인 왕국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이어나가 보자. 스페인 왕국에서 추방 당한 유대인들은 프랑스를 지나 동족들이 기반을 잡고 있던 플랑드르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당시 플랑드르 지역의 브뤼헤 (Bruaes)는 당시 북유럽 최대의 중개무역도시였는데 큰 홍수로 항구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당시 5대 도시 중 하나로 대도시였던 앤트워프(Antwerp)로 이동하게 된다.
유대인이 앤트워프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때에,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스페인 통일 왕국의 재정적자가 지속되었다. 당시 전쟁의 대부분은 용병을 썼는데 재정적자로 인해 용병들이 월급을 받지 못하자, 먹고 살기 힘들었던 그 용병들이 앤트워프 지역의 시민들을 약탈했고, 이 과정 중 1576년 6000명 살해되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잔임함에 놀라 도망을 치게 되었고, 드디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지역 도착하게 되었다.


다음 포스팅에서 이야기 계속!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