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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CS/경제 이것저것

경제 이것저것 #03 : 유대인은 어떻게 네덜란드 시장을 장악했는가? (삼프로TV) (2)

관리자 2021. 6. 13.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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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은 삼프로TV의 "유대인이 네덜란드에서 부를 지배한 방법 f.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신과함께 #179]" 편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https://youtu.be/GZ-8upInfJ4)

유대교의 상징인 육망성 (출처: 구글)



2021.06.10 - [ECONOMICS/생활 경제] - 경제 이것저것 #04 : 유대인은 어떻게 네덜란드 시장을 장악했는가? (삼프로TV) (1)

 

 지난 포스팅에서 유대인이 스페인 왕국에서 추방 당한 이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과정에 대해 살펴봤다. 이후 네덜란드에서 유대인들이 경제를 장악하게 되는 역사를 살펴보자.


소금 시장을 장악한 유대인

소금에 절여진 청어 (출처: 구글)

 유대인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했을 당시, 네덜란드는 도시가 슬슬 형성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인구는 100만명 정도 되었는데, 그곳의 사람들의 생활은 여의치 않았다. 이유는 네덜란드의 지형이 늪지대이면서 저지대였던 것. 지형이 늪지대인 경우 지반의 물이 소금기를 머금고 있어 경작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당시 네덜란드는 대부분 어업을 행하고 있었다.


더치 페이(Dutch Pay)?

‘1차는 내가 쏜다!’. 우리가 흔히 음식값 등을 먹은 사람들끼리 나눠서 내는 ‘더치페이’라는 말은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네덜란드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늪지대에 살던 네덜란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했고, 그렇기에 음식값을 대표로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어 각자 먹은 만큼만 내야했다. 이러한 네덜란드인의 상황이 반영되어 더치페이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한다.



 네덜란드인들은 어업 중 유독 청어 사업이 잘 됐다. 왜 그랬을까? 일단 네덜란드인들이 청어를 잘 포획했다. 이에 더해 네덜란드 어부들이 하나의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청어를 잡자마자 내장을 다 빼내 소금물에 담궈놓았다. 정확히는 바닷물을 햇빛에 쫴 수분을 85% 날려 만든 ‘담수’에 담궈 놓고, 육지에 와서 소금에 절이면 이 청어는 1년 이상 유통 가능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이러한 기술은 굉장히 획기적이었다. (현재 세계 10대 악취나는 음식으로 알려진 '수르스트뢰밍'이 이것)

 이러한 이유로 당시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소금을 장악해야 했다. 이러한 소금 장악권을 쥐고있었던 건 북부 독일 지방의 한자동맹이었다. 이들이 북부에 ‘암염’을 공급했었다. 유대인들은 소금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어떻게 장악할까 고민했다. 그 당시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서는 천일염을 만들어 대구를 절였다. 천일염은 암염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했고, 품질이 더 좋았다. 노련한 유대인은 스페인에서 소금을 수입해서 공급했고, 한자동맹을 몰아내고 소금 시장을 장악했다. 유대인들은 따로 협회를 만들어서 소금 시장을 독점했고, 이와 더불어 소금의 품질을 표준화했다. 결국 유럽에 절인 청어 산업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자동맹?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은 13~17세기에 독일 북쪽과 발트 해 연안에 있는 여러 도시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연맹이다. 주로 해상 교통의 안전을 보장하고 공동 방호와 상권 확장 등을 목적으로 했다.


조선업을 획기적으로 발전

출처: 구글

 유대인들이 청어 산업을 장악하고 난 후 유럽 전역으로 청어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면서 점점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고기잡이배를 만들어 보급하기 위해 조선사업을 시작했다. 그저 고기잡이배를 만드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화물선까지 만든다. 당시 화물선은 교역을 하려면 발트해까지 가야했는데, 당시 관세 대신 일종의 통행세를 걷었다. 이때 통행세를 산정하는 기준은 갑판의 크기였다. 상품의 물량을 직접 세는 것이 비효율적이였다. 그래서 갑판의 크기가 크면 더 많은 물건을 실을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갑판의 크기로 통행세를 정한 것이다.

플류트선(Fluyt Ship)의 도면. 선복이 크다.


 여기에 머리가 잘 돌아가는 유대인들은 꾀를 내었다. ‘갑판의 크기를 줄이자!’. 불필요한 대포들은 모조리 떼어내 대포들이 차지하는 공간을 최소한으로 해 갑판의 크기를 줄였다. 대신 짐은 배의 아래 쪽은 ‘선복’에 실었다. 이러한 갑판이 좁고 배가 큰 플류트선(Fluyt Ship)은 역사를 바꾸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 앞 바덴만은 세계적인 갯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닥이 평평한 평조선을 써야했다. 바닥이 뾰족한 편조선은 사용할 수 없었다. 평조선은 편조선에 비해 속도는 느리다. 하지만 만들기 매우 편했다. 편조선은 용골 만들고 속에서 배를 만들었는데, 평조선은 땅 위에서 용골 없이 만들고, 단가 쌌으며, 크게 만들 수 있었다. 여기에 유대인들의 장점인 ‘표준화’를 적용했다. 그리하여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순식간에 배를 만들 수 있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당시 배의 구조로는 삼각돛과 사각돛을 컨트롤할 인력이 필요했다. 유대인들은 여기에 드는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복합도르레를 개발했다. 이를 통해 다른 선박에 비해 인건비가 1/3로 줄었다.

 종합하면 유대인들의 배는 1) 통행세가 적었고, 2) 빨리 제조되었으며, 3) 인건비 또한 적었다. 결국 유대인들의 힘에 입어 네덜란드가 유럽 무역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

 

활발한 무역, 최초의 주식회사와 주식거래소 등장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출처: 구글)

 유대인이 조선업을 장악하고 이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중심으로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자연스레 대부분의 화물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였고, 점차 암스테르담은 물류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현재도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물류기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한 도시가 물류기지가 되면 자연스레 중개무역이 발달하게 되며, 이러한 중개무역을 지원해주는 금융업과 보험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많은 상선들이 동양의 향신료 구하러 가던 시절, 약 14개 정도의 회사들이 심하게 경쟁했다. 유대인들은 경쟁하지 않으면서 품질과 서비스로 제값 받는 성향이 있었다. 경쟁이 과열되자 이를 완화시키기 위해 정부/의회 차원에서 이들을 하나로 통폐합했고, 이 회사가 바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이다.

 동양에 한번 다녀오면 거의 2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상인 한 둘로는 해결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회사 차원에서 투자자가 있어야 동양으로 교역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유대인들은 여기에 앤트워프 시절 시도했던 '주식회사'개념을 가져와, 이를 동인도회사에 적용하여 근대 최초의 대형 주식회사로 만들었다. 주식회사이기 때문에 여러 상인들로부터 투자를 받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영국동인도보다 자본금 8배나 많아졌다. 이후 동인도회사에 여러 권한(군사권, 전쟁선포권 등)을 부여하여 점점 대형화되었다.

 한편으로 2년 이상 걸리는 항해 동안 사람들이 주식을 가지고 있기에 이 기간은 너무 길었다. 회사에 투자한 누군가가 급전이 필요해 자신이 투자한 금액이 당장 필요하게 되었다. 이 경우 다른 마을 주민에게 '내가 투자했다는 사실을 이 증서에 적어 줄테니, 이 증서를 받고 나에게 그 금액을 다오.'라고 하며 주식을 팔 필요가 생긴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투자 증서 격인 주식을 거래할 필요성이 생겼고, 정부 차원에서 주식을 사고 팔 수 있는 주식거래소를 만들어줬다. 이것이 근대 최초의 대형 주식거래소이다.

 

중앙은행의 등장

최초의 중앙은행인 암스테르담 중앙은행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유럽 각국의 돈이 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다 모이게 되었다. 화폐가 너무 다양해진 나머지 위조주화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한 상인들은 본인들이 주축이 되어 '길더(Guilder)'화로 화폐 통합을 이룬 후 세계최초의 중앙은행인 '암스테르담 은행'을 설립한다.

 당시 상인들이 화폐 통합을 이룬 방식은 다음과 같다. 당시 화폐는 금세공사가 만들었는데, 주조하는 과정에서 금세공사에게 지불하던 수수료가 있었다. 이렇게 화폐 주조를 담당하면서 금세공사가 은행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당신의 금괴를 보관하면 이에 대한 보관증을 드립니다.'와 같은 식. 이로 인해 금세공사마다 수수료도 다르며 화폐 주조에 표준이 없었던 상황을 본 상인들은 암스테르담 은행에서는 수수료를 무료하겠다고 공표한다. 수수료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금괴와 은괴는 암스테르담 은행에 모이기 된다.

 또 일정 금액이상 길더화를 쓰면 길더화 수표를 쓰게끔 강제했다. 사람들은 굳이 무거운 금은화를 들 필요없어 편했다. 또한 수표에 대한 신용의 경우. 민간이 은행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수표에 대한 지불보증을 시, 의회가 보증을 해주었다. 이를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종의 '결제 시스템 방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화폐통합으로 인해 은행결제가 활발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환어음 거래 방식을 택하던 것과는 다르게, 한자동맹은 수표 환어음 거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무조건 현물 거래 방식을 선호했다. 이들은 환어음을 통한 결제의 편의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이러한 결제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동양과의 활발한 거래

 한편, 유대인들은 동양과의 거래를 통해 이득을 많이 취했다. 다른 유럽국들 물론 동양과 무역을 했다. 하지만 무역의 길에 선교사를 데리고 가서 기독교를 동양에도 퍼뜨리려고 했다. 이에 동양국들은 자신의 국가에 종교를 퍼뜨리려는 서양 세력들이 탐탁치 않아 이들과의 국교를 끊어 버린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달랐다. 왜일까? 유대교는 민족 종교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종교를 타국으로 퍼뜨리지 않는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동양인들과 국교를 지속할 수 있었다.

 

 당시 주로 교역했던 물품은 향신료, 비단, 도자기였이며, 이 물품들로 폭리를 취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도자기는 귀족들의 부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서양 귀족들로부터 엄청난 수요가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물품 교역을 통한 수익은 단 22%였다.

 나머지 수익은 '환거래'를 통해 얻었다. 당시 서양 국가들은 금을 해에 은을 달에 비유했다. 1년동안 12개월이 지나니 금과 은의 가치가 12:1정도 되었다. 하지만 동양은 당시 세금을 은화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은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더 높았다. 유대인들은 서양에서 상대적으로 값이 싼 은을 동양에서 금으로 교환해 자국으로 가서 금을 판매하여, 환거래를 통한 차익 거래를 노렸다.



다음 포스팅에 이어서 계속! (아으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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