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올해 모나코 그랑프리(Monaco Grand Prix)는 엄청난 비로 인해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딜레이 되었다. 심지어 2021년 벨기에 그랑프리(Belgium Grand Prix) 때는 심지어 레이스가 도중에 취소되기도 했다. (3바퀴 돌고 포인트 절반...!)
알다시피 포뮬러 원에는 웻 컨디션(Wet Condition) 즉 비가 오는 날씨를 위한 맞춤 타이어가 존재한다. 웻 타이어는 2가지가 있으며, 인터미디에이트 타이어(Intermediate Tyre)와 풀 웻 타이어(Full Wet Tyre)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웻 타이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당연하게도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웻 타이어로도 주행이 어려울 수 있지만..) 수많은 관중이 모인, 그리고 수많은 돈이 투자된 레이스를 제시간에 시작하지 않는 것일까? 어떤 이유로 심지어 경기를 취소까지 해버리는 것일까?
포뮬러원 선수라면 포뮬러원 선수답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레이스에 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물며 만약 위험하다한들 '비가 오는 날에는 전체적으로 차량 속도를 다소 늦추어야 합니다.'라는 규정을 추가하면 되는 게 아닐까? (마치 VSC나 SC 상황처럼!) 아무리 그래도 레이스를 취소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관중의 입장으로서 위와 같은 궁금증 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웻 컨디션에서의 레이스는 그리 단순히 차량의 주행이나 드라이버의 담력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F1 레이스와 웻 컨디션(Wet Condition)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자.
안전이 최우선
먼저 우리는 안전(Safety)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담한 F1 드라이버들은 '모터스포츠는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수하고 하는 스포츠라는 것'을 인지한 상태에서 트랙으로 나간다. 그렇지만 드라이버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이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목숨과 신체를 너무 터무니없게 걸진 않는다. 낙하산이 펴지지 않는 사실을 알고서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다.
나를 포함하여, 관중으로서 스포츠를 관람하는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경기에서 누군가 사망하거나 크게 다치는 모습은 보고싶지 않다. 그냥 누군가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차량이 서로 경합하다가 약간의 컨택으로 F1의 카본 파이버가 부서지는 정도(?)만 원한다. 또는 그냥 섀시가 부서지거나, 드라이버가 DNF 되거나 하는 정도(?).
이런 사소한 사고가 발생하기를 바라는 것도 사실은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지만, 사망 사고보다는 백배 천배 만배 낫다.
드라이버의 목숨 뿐만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트랙 마샬(Marshall)을 포함하여 트랙 스태프들의 목숨 또한 지켜내야 한다. 이 분들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서킷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파편(Debris)들을 치운다. 여기에 더해, 이분들은 트랙의 배리어 뒤에 있긴 하지만, 차량이 언제 배리어를 뚫고 그들을 칠지도 모르는 것이고, 차량들의 충돌로 인해 튀기는 파편을 맞아 다칠 수도 있다.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웻 컨디션(Wet condition)에 대해
다시 웻 컨디션으로 돌아와 보자.
비가 오는 날에도 앞서 말한 웻 타이어를 장착하고 차량은 트랙을 달릴 수 있다. 심지어는 '아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경기 못하겠는데?' 했는데 경기가 속행되기도 한다. 비가 오더라도 경기를 중단시킬지 아니면 속행할지는 판단하는 기준이 따로 있는 걸까?
웻 컨디션에서 레이스를 할 수 있는가 없는지 판단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에 대해 가볍게 하나씩 짚어보자.
#1 응급 의료 문제
첫째로 응급 의료와 관련된 것이 있다.
세션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이러한 규정이 있다.
서킷으로부터 20분 안에
신경외과 의료진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할 것
드라이버가 심각한 두부(Head) 손상이나 척추(Spinal) 손상이 있는 경우, 숙련된 의료진에 도달해야 하는 타임 윈도우(Time window)가 존재한다. 특정 시간 안에 조치를 취해야 드라이버의 목숨을 지켜낼 수 있다.
위의 규정으로 레이스가 열리는 모든 서킷에서 병원까지 어떠한 방법으로든 2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 있다. 일부 서킷은 병원까지 차량 운전으로 2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일반 로컬 병원에 임시로 신경외과 응급실을 마련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일부 서킷은 차량 운전으로 병원에 다다르기 힘들다. 이러한 경우에는 의료 헬리콥터를 타고 가야 한다.
차량을 이용하든 의료헬기를 이용하든, 날씨가 무척이나 중요하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의료 차량의 속도를 충분히 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헬기를 이용하는 것이 빠를지언정, 날씨가 흐려 시야 확보가 되지 않아 헬기 운행에 제한이 있거나, 날씨 문제로 헬기가 어두운 구름 속을 헤쳐나가야 한다면 환자가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하지 못할 수 있다. 심지어는 헬기 추락 등 2차 사고까지 발생할 수가 있다.
이러한 응급 의료와 관련된 문제로 세션이 연기되거나 취소될 수 있다.
#2 트랙 상태 문제
다음으로 트랙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비가 엄청나게 많이 오는 경우 트랙에 물 웅덩이(water puddle)가 생길 수도 있고, 심지어는 트랙 상태에 따라 물이 고이다 못해 강처럼 흐르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F1 차량은 알다시피 굉장히 차체 자체가 굉장히 낮다. 지면으로부터 고작 약 30~80mm 정도 떨어져 있는 수준이니 말 다했다. 이렇게 차체가 낮은 상황인데 트랙에 물이 많이 고여있으면, 플로어가 물에 맞닿아 흐르는 물 위에 둥둥 떠있는 것처럼 된다. 이로 인해 차량의 접지력이 부족해져 버린다.
이것과 비슷한 문제로 아쿠아플레이닝(Aquaplaning) 또는 하이드로플레이닝(Hydroplaning) 문제가 있다. 물웅덩이나 물이 심하게 고여있는 상태인 트랙으로 차량이 나간다면, 차량이 바퀴 또한 고인 물 위에 뜨게 된다. 이로 인해 순간적으로 고인 물에 떠 미끄러져나가거나, 타이어와 트랙 사이의 접지력 부족으로 인해 스핀이 발생할 수 있다. 이를 아쿠아플레이닝(Aquaplaning) 또는 하이드로플레이닝(Hydroplaning)이라고 한다.
이 녀석들은 그 자체가 위험하지만, 특히 브레이킹 존(Braking zone)이나 코너에서 스티어링 조작이나 브레이킹 컨트롤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당연스럽게도 고속으로 달리는 상황에서 큰 사고를 유발한다.
차량 하나가 사고가 발생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2차 사고 발생 가능성이다. 젖은 노면으로 인해 차량이 스핀한 지점은 다른 드라이버들도 그 지점에서 스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이중, 삼중 그 이상의 추돌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는 굉장히 심각한 사고다.
#3 타이어의 한계
물론 앞서 말한 대로 인터미디에이트(Intermediate) 타이어와 풀 웻(Full Wet) 타이어가 어느 정도 아쿠아플레이닝을 해결해준다고는 하지만 여기에도 분명 한계는 존재한다.
드라이 컨디션에서 사용되는 슬릭(Slick) 타이어의 경우 타이어에 홈이 없기 때문에 고여 있는 물이 있는 경우 주행이 불가능하다. 마치 물 위에 떠있는 보트 같다고 해야 할까.
인터미디에이트 타이어와 풀 웻 타이어의 경우는 타이어에 홈이 있고, 홈을 따라 타이어 표면에 섬이 있는 것과 같이 표면이 형성되어 있다. 이런 모양으로 만든 이유는 타이어가 지면에 맞닿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이와 더불어 표면의 홈을 통해 물을 빼주는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트랙의 타막 표면과의 접지력을 어느 정도 발생시켜 차량을 통제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인터미디에이트 타이어의 경우, 풀 웻 타이어에 비해 지면과 맞닿는 러버의 면적이 상대적으로 크다. 이는 트랙과 더 많이 닿아 접지력을 올리기 위해서다. 이때 중요한 사실이 타이어와 맞닿는 면적이 줄어들수록 타이어는 더더욱 과열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트랙에 물이 충분치 않다면, 과열된 타이어를 식힐 방법이 없기 때문에 웻 컨디션 타이어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풀 웻 타이어를 낀 채로 달리다가 노면이 마르기 시작할 때 급격하게 타이어가 과열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드라이버는 과열 문제 때문에 일부러 레이싱 라인을 벗어나 물을 밟기도 한다.
#4 차량 셋업 문제
다음으로는 차량 셋업에 문제가 있다. 풀 웻 타이어는 일반 타이어보다 10mm만큼 지름이 더 크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일반 타이어를 꼈을 때보다 차량이 5mm 정도 지면과 더 떨어진다. 아주 큰 차이는 아니지만 서스펜션 셋업을 수정하지 않았으나 차고가 높아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로 인해 파크 페르메 규정과 함께 복잡해지는 상황이 있다. 만약 웻 컨디션에서 퀄리파잉이 이루어지고, 드라이 컨디션에서 레이스가 진행되는 경우(또는 그 반대의 경우도 동일), 파크 페르메 규정으로 인해 살짝 복잡해진다.
만약 날씨 예보 상 퀄리파잉 때 비가 오지만 레이스 때는 비가 그친다고 해보자. 이 경우 레이스를 고려해서 차량 셋업을 해야 하므로 퀄리파잉 때에는 최적의 셋업보다 차고가 5mm 정도 더 높아지게 된다.
참고 | 날씨가 웻에서 드라이로 또는 드라이에서 웻으로 바뀌는 경우, 파크 페르메 규정을 약간 완화시키기도 한다. 브레이크나 레디에이터 덕트를 변경시키거나, 차량 프론트 쪽에 있는 피톳 튜브(Pitot tube, 공기의 유속 등을 측정하기 위한 장치)를 cover/uncover 하는 등의 작업이 허용된다. (자료)
#5 드라이버의 시야 확보 문제
타이어 지름이 더 커진 만큼 물을 더 많이 빼낼 수 있기 때문에 좋다. 하지만 물을 뺀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다른 문제가 있다.
피렐리(Pirelli)의 인터미디에이트 타이어는 시속 300km 기준으로 매초 30L의 물을 빼주며, 풀 웻 타이어는 무려 80L를 빼내 준다.
실로 엄청난 성능이다.
이렇게 빠져나온 물은 어딘가로 흩뿌려지게 되며, 이 흩뿌려지는 물은 바로 뒤따르는 차량과 트래픽으로 향하게 된다. 여기에 더불어 차체 아래쪽이나 디퓨저가 빨아들이는 물까지 공기 중으로 흩뿌려지게 되는 것을 감안하면 양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위 그림을 보면 실제 드라이버의 시야가 얼마나 심각해지는지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도 추월을 시도하는 드라이버가 있다.
아무튼 이렇게 드라이버의 시야를 가리는 것은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상황이 심각해지면 세이프티카가 발동되어 세이프티 카 통제 하에 차량이 느리게 달리게 할 수도 있다. 세이프티카 하에 차량 행렬을 유지시키는 게 안전 측면에서 상황을 더 낫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차량이 진행되면서 트랙에 고인 물들을 트랙 밖으로 흩뿌리게 하여, 트랙을 멀끔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경기 자체가 아예 중단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안전이 우선!
우리는 관중으로서 F1 경기가 속행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작년 벨기에 그랑프리 때에는 제주도에 여행을 가서 맥주와 함께 경기를 시청할 준비를 했으나, 엄청난 비로 경기가 시작되지 않자 솔직히 많은 불평불만을 했었다.
하지만 우리 내 인생사도 그렇듯 때때로 기다림이 필요한 법이다. 비가 확실히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드라이버와 마샬들을 포함하여 모두를 안전하게 만드는 길이 아닐까 싶다. 인명 사고를 막을 수 있다면 경기가 취소되는 게 뭐 대수인가!
단순히 웻 컨디션이 차량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생각했고 응급치료나 마샬들의 안전 이슈도 있다는 것은 몰랐었는데, 이번 포스팅을 정리하면서 또 많은 지식을 얻은 것 같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F1 트랙 적합성에 대한 포스팅을 쓸 예정이다.